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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클루지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공디세미나를 이틀 연속 다녀온 이후에 처참히 쓰러지고, 이주간 엉망으로 살았다. 낮밤은 끝없이 바뀌어가고, 욕망에 찌들어 살았다. 먹고 자고의 연속. 뭘 놀았다고 하기도 애매한 창피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기 위안을 해보자면, 이동중에는 책을 붙잡고 있었다는 점이 그나마 보람차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글쓰기가 없는 읽기에, 수많이 증발했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읽은 부분이 3분의 1이상이 되기에 얼추 느낀점들을 다시 책을 상기시키며 적어내려가 보겠다. 책의 내용 일부, 본인의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이 글에서는 목차 <2부, 건축 뒤에 숨은 사회를 발견하다.> 를 다룬다.
사회와 공간은 상호관계적이다. 공간의 의미는 사회로서 성립하고, 사회의 의미는 공간으로서 실현된다. 집이 있다는 것은 작은 사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작은 사회를 가졌기에 집이라는 공간이 필요하다. 정주할 곳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회에 속했다는 말과 같다. 동시에 주거는 사회적 차단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폐쇄적이며, 단계별로 마당과 같은 점이지대를 만들어 다양한 개인경험공간을 구축한다. 그 너비와 형태가 개별의 재력을 과시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사회에 반영되어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 사회와 공간이 자본주의의 효율에 의한 획일화가 되어감에 따라, 욕망의 카피 혹은 더 큰 욕망을 가지고자 노력하고 일한다.
미디어화 된 주거 - 그 욕망을 표현하는 주체는 미디어화 되었다. 미디어화 되어, 무엇이 좋은지 판단내려지게 수동적인 행위가 되었다. 또한 그마저 대자본으로부터의 투자를 받아, 그들의 수익을 충족시킬만한, 미디어적인 차별성을 내세우며 주거공간을 '유행'시켰다. 그것은 실 사용자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공간의 미디어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좋은 관심이지만 '구해줘 홈즈'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들어서면서 미디어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동시에 모든 집이 비슷한 지루함을 느끼며 차별성 있는 주거에 대한 요구도 증가했으리라 믿는다.
장소성 - 저자는 장소성에 대해 강조하는 듯 보인다. 장소성이란 공간과 다른 의미로, 그 자체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기억에 남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공간이다. 물리적 공간이 지어지고, 그곳에서 이뤄지는 행위를 통해 물리적 공간만의 특징이 생긴다면 그것이 '공간의 실천'이라 칭한다. 그리고 공간의 실천이 이뤄졌을 때, 장소성이 실현된다. 근대건축의 일편단율적인 효율이 아니라, 그 좌표 그 위치 그 관계에서 생기는 공간의 표정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욕망이라는 '분비'라는 개념에서 공간을 형성한다.
공동체 - 공동체는 공간의 벽을 통해 생긴다. 벽을 통해 만들어지는 평면이 우리에게 공동체라는 사회를 경계짓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공간은 공동체를 묶고 수행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 공동체가 분열되어 핵가족 이하로 분해된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과 사무실을 공유하는 금종각의 '소규모공유오피스' 개념이 생겼고, 아이를 낳지 않는 저출산 문제에 힘입어, 친구와 같이 살거나 , 2인유지 가구, 1인가구가 급증하고 이에 맞춰 인간의 사회참여 욕구를 가중시킬 문화활동 공간이 필요해졌다. 그에 따라 '후암연립'과 같은 마을 단위 공동체 형성 및 여가 서비스를 하는 건축사무소가 생기기도한다. 건축사무소지만, 임대업에 기대고 있는, 마을 브랜딩에 가까운 사업이 주목받는다. 공동체를 어떻게든 이루려 우리는 노력할 것이다. 근대에 이어 현대에 이르기 까지, 언제나 X 세대 MZ세대와 같은 다음 세대 주목현상이 생기는 것에도, 다음 세대들이 이루려는 생활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Meme으로써 존재하는 것들이 우리에겐 중요한 것들이 되었고, 무거운 비지니스 마저 문화화된 유행(meme)에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공동체는 가벼워졌고, 끈끈하지 않은, 얕지만 친절한 많은 관계로서 나타난다. 그렇기에 큰 논쟁은 꺼리고, 조금만 불편해져도 숨을 수 있는 그런 프라이빗 공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같은 공동체라는 단어지만, 시대에 따라 의미는 변화한다.
평등은 본능이 아니다. - 밀어내면 밀쳐진다. 벽을 치면 공동체가 성립되고, 밖(void)으로는 공적영역이 성립된다. 벽은 법에 의해 형성되고 법은 평등을 만든다. 즉, 벽은 평등을 만드는 기초다. 자연 앞에 우리는 모두 다르고 불평등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안전할 수 있는 평등을 법을 통해 벽을 세웠다. '이소노미아'는 이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고유한 본성이라 말한다. 법에 의한 평등이지 인간이 본래 평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본래 불평등한 존재였다. 우리는 그렇게 법을 통해 도시를 이루었고, 도시의 평등에 대한 요구가 공간을 만들었다. 모두가 사는 곳이 같아야 한다는 '밀레투스의 격자상 구획'에서 근간한다.
나타나는 공간(아고라 agora)과 숨는 공간 -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란 정치적으로 참여, 피력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즉 타인을 통해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를 '나타남'이라고 표현했으며, 언론이 나타나는 공간은 아렌트는 '출현 공간'이라 칭했다. 공유공간에 본인이 나타나 말하고 듣고 기억하며, 이러한 행동들이 자유를 형성했다. 기억을 위한 공간이기에 폴리스는 인간의 수명을 넘어 존재해야 했고, 건축물의 내구성을 높였다. 그렇게 나타냄을 통한 도시의 공공성을 강조했고, 닫혀있는 사적 영역에 대해 경계했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건물이 맞붙지 않는 법을 만들었고, 아렌트는 맞붙지 않은 가까운 경계를 '무인 지대'라고 칭했다. 무인지대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동시에 유지하는 것이다. 그저 분리하는 것이 아닌, 공존을 꾀하는 것이다. 공적이면서 사적일 수 있고, 사적이면서 공적일 수 있는 애매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프라이버시 - 사적 공간을 공적인 것으로 부터 빼앗은 일부라고 본다. 부정적으로 바라봄에도 현대에 그토록 중요시 하는 이유는, 수많은 인간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함이다. 넘어서 남에게 관리받지 않을 자유를 외치며 변화했고, 공적인 영역에는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는 개인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아주 좁은 프라이버시 공간을 지키기 위한 욕구로서 프라이버시는 존재한다. 우리는 공적영역에서 마저 스마트폰이라는 아주좁은 사적 영역으로 쫒겨나게 되었고, 우리의 나타남은 스마트폰으로 사라졌다. 그것도 익명으로. 나타남이 약점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 의견이 다르면 곧바로 이슈가 되고, 재단 당한다. 이유는 없다. 국가권력, 공공사회가 만든 법은 다수를 따른다. 그리고 소수를 위하는 척한다.
건축의 지속성 - 건축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구성과 영속성을 가지는 것이 고결한 이유가 무엇일까. 오랫동안 쓸 수 있고, 인간 대비 스케일이 커서, 위대해야하고 무거워야 하는 것일까. 많은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만큼, 더 대단한 가치를 지녀야하기 때문일까. 상대적으로 건축이라는 것이, 개인을 주체로 이뤄질만큼 쉬워진 오늘날 같아야하나 싶지만, 저자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아보인다. 언제나 특정 개인에게 추억의 장소가 되어야하는 장소성을 띈 공간이 필요하다. 세계적 관점으로 보아서, 물적 성질간의 관계, 그리고 특히 단순노동이 아닌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의미 있는 물성에 대한 '다른' / '차별성'을 가진 세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함을 말한다. 물적공간으로 만들어지고 기억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그렇지 않더라도 활동과 언론의 의도를 통해 공간에 물화를 가미한다. 그로써 공간은 장소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공간(세계)을 보며 기억하고, 목적은 언론과 활동을 통해 구성된다. 목적이 악할지언정 공간은 인간에계 왜곡되어 선한 의미로서 기억될 수 있다. 그것이 어떻든 의미없이 노동뿐인 공간은 별로다.
노동은 작업과 다르다. - 저자는 노동과 작업에 차이를 둔다. 노동으로 물화된 세계를 세계가 사라진 것이라고 본다. 없는 세상. 이는 앤디워홀과 대비된다고 보여진다. 단순노동을 통해 작업을 물화한, 그것도 타인의 노동을 통해 작업을 물화한, 세계를 구축한 앤디워홀은 물화된 노동을 활동삼아 작업해, 노동과 작업의 일체화를 시켰지만 본질적으로 작업을 행했다는 저자의 뜻을 따른다. 다만 직접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건축의 물화와는 다르다. 그가 예시로 든 '베를린 국가의회 의사당'은 물화자의 행위에 개입이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설계라는 행위를 직접 행했으나, 사회(공동체)의 개입이 있었다는 판단이다. 여기서 물화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더 중요해보인다. 물화에는 공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포함되어보인다. 사람의 기억을 통해 물화되고,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해결적인 의미를 가진 것을 실체화 하는 것이 진정한 물화이며,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물'이다. 그렇다면 앤디워홀의 물화는 이전에 없던 예술형식이라는 기억에서 의미 있는 물화를 거쳤다. 그리고 단순노동을 통한 작품을 예술사의 있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기억으로 물화했고, 세계에 편입한 것이다. 그렇게 '물화로써 활동과 언론과 사고의 근거가 된 것'이다. 남은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사당의 예시처럼, 존재하는 해결책을 기가막히게 제시하는 상황이 주어지기 힘듦이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황이 모두에게 한번쯤은 쥐어지리라 생각되고, 그 때 이를 기억함이 도움이 되리라. 결국은 획일화된 것을 만들지 않고, 장소성을 추구하기 위한 이론적인 이야기 같아 보인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맞는지 모르겠다.
욕망의 획일화 - 미디어를 통해 사람의 개입은 사라지고, 자본사회라는 가치가 건축과 욕망에 스며들어 인간의 욕망을 획일화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국가의 힘에 기대어 국가 운영의 정도가 개인의 삶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 도래해, 국가의 의도가 개인의 의도가 되는 중앙집권적 성향이 굳어졌다. 다만 이전의 중앙집권과 다른 점은 우리가 교묘하게 대중적으로 바라는 점을 찾고, 이를 심화시켜 심각한 일처럼 꾸미고, 대중 스스로 그 틀에 벗어난 이들을 재단하게끔 활용한다. 인간의 감성이 잔뜩 묻은 얕은 이성을 활용하는 듯 보인다. 누구도 나라 국정에 작은 일을 개인 일처럼 나설 이는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적당한 선에서 이루어진 대중의 작은 의견을 큰 의견인 마냥 부풀리기도 하며 정치 행위에 활용한다. 그 중심은 특정층에 유리한 득표 행위로서 발현한다. 이러한 사회가 건축에 영향을 미치고, 현대에는 친환경적이고 복지 좋은 공간, 공유공간이 있는 공간, 취약계층을 배려하는 공간이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이는 정치적 의도와 같은 선상에서 활용되고, 허물좋은 가짜를 결과물로 내놓는다. 작업을 가장한 단순노동인 셈이다. 악한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누구도 좋지 않은, 사용자를 고려하지 않은, 허울 좋고, 언론에 내기 좋은 가치로 홍보한다. 이렇게 권력은 강화되고, 권력에 의한 도시로 서울은 부상한다. 이러한 것들을 말고도, 효율을 위해 벽을 통해 공동체를 분리한 도시 권력 행위가 더욱 강해져 청년 고독사, 노인 고독사와 같은 사회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지만, 한 시대에 다양한 공동체 구성원이 아닌 비슷한 공동체 구성원으로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권력을 담은 공간에 의해, 사회에 의해 획일화된 공동체 방식이 문제라고 본다.
공간의 재단을 통해 공동체까지 효율로써 재단한 것은, 벤덤의 <판옵티콘> 구조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관리를 위한 구조이다. 창의가 자본이 되는 세상에, 미국이 앞설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의 효율에 더해서, 점이공간의 넓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타냄의 공간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에 있다고 본다. 효율과 장소성을 동시에 갖는 구조로, 상승구조로 다양하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 또한 중앙집권의 강한 공산국가이지만, 정치적인 발언을 제외한 예술계에 대한 관대한 정책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다양한 경제적 혁신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본다. 반면에 우리는 좁은 공간에 엄청난 효율로 무장한 국가다. 창의성 보다는 훌륭한 훈련을 통해 받아들이고 응용정도에 멈췄다고 본다. 이는 국가주도 성장에 원인이 있다. 다양성을 더욱이 받아들이고, 공간의 다양성을 갖출 수 있는 토지활용이 필요하다. 싼값에 더 다양한 작업을 통한 물화를 세계에 일으키고, 싼값의 땅이 몇배가 되는 국가단위 성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의 획일화를 멈추고, 공동체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한다.
권력에 근간이 되는 플라톤의 지식과 행위의 분리를 통해 나타났으며, 예술계에도 그의 분리를 오히려 적용해, 예술의 산업화를 꿈꾸고, 현실화되기도 했다. 공간이 예술보다 우선적으로 반영된 것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간은 그렇다면 공동체의 획일화를 멈추기 위해서 무한히 벽을 부숴야할까. 아니면 벽 간격을 넓혀야할까.
공생에서 권력이 온다. - 아이러니하게도 공생을 통해 권력은 형성된다. 사람이 모일 수록, 그것도 긴밀하게 모일 수록 강하게 형성된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공생에서 권력을 형성한다. 그 권력은 소수자와의 공생을 원하는 이들이 모인, 혹은 누구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만든 공생의 장치가 만든 하나의 강한 권력을 만든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우리는 더이상 이렇게 강한 공생권력에서 다른 나타냄을 표현할 수 없다. 다양성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발생하더라도 금방 잡아먹힐 행위다. 우리가 질타하면 권력도 무너지는 것을 보지 않는가. 왜냐하면 무너져야 공생이 형성되고 권력도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주 '효율적'이고 '감성적'인 공간은 물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공간디자이너에게도 무엇이 진정한 물성을 가진 작업인지 모르게 만든다. 오히려 심화된 국가권력기구를 디자인한다. 나도 모르게. 실질 사용자(타겟)가 아닌, 권력이 감성적으로 밀고 있는 가상의 사용자(타겟)을 통해. 이렇게 심화된 데에는 미디어의 역할이 컸다.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어, 참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익명으로서 힘없는 하나의 의견이라는 것이 문제다. 뭉쳐야 의견이 된다는 생각이 문제라고 본다.
어쨌든 공간은 사회를 바꾸고, 사회는 공간을 바꾼다.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빌라가 그 예시로서 저자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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